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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에 자극을 주는 뜻밖의 물건들

-예술가의 감성템④ 제품 사용설명서, 프라모델, 3D프린터

인간이 다른 동물과 차별되는 여러 지점 중 하나는 필요에 의해 새로운 물건을 생각해내고 만드는 것이다. 나의 작업 결과들도 일종의 발명품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물건들이 만들어진 궁극적인 목적은 전혀 실용적이지 않다. 개인적으로 일상에서 느끼는 사람과 그들의 이야기, 멀리는 사람과 사회에 관해 다소 씁쓸하고 냉소적인 시선으로 담아내는 것들이 많다. 그래서 가상의 기업(혼자산업 또는 혼자전자라고 부른다)을 만들어 페르소나로 활용하거나 프로젝트 중심으로 활동해 왔다. 또 작업을 시작한 이래 상당 기간 여러 작가, 기획자와 함께 세운상가에서 ‘스페이스바’라는 공간을 운영하며 공동 혹은 개인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또 아이들을 위한 여러 기술과 예술융합교육 프로그램을 연구하고 개발해 왔다. 이런 나에게 영감을 주는 수많은 물건 중에서 중요한 몇 가지를 꼽으라면….

읽는 동안 펼쳐지는 상상 – 제품 사용설명서

광고를 보며 한참을 고민한다. 저 물건을 갖게 되면 이전보다 더 나아질 나의 삶에 대해 그려본다. 이렇게 될 거야, 저렇게 될 거야, 누군가가 내게 꼭 필요한 그것을 만들어냈어, 정말 대단해! 정말 꼭 갖고 싶어! 고민 끝에 마침내 그 물건을 집어 들고 이전보다 업그레이드될 나의 삶과 모습에 두근거린다. 물건을 사서 돌아오는 길은 마음이 급하지만 지금 당장 그것을 사용할 수 없으니 포장박스라도 열어본다. 새 제품이 가진 독특한 향이 난다. 냄새를 뒤로하고 매뉴얼을 꺼내 본다. 제품 개요와 각종 기능 사용에 따른 주의 사항 그리고 문제가 생겼을 때의 해결 방법이 그림과 함께 빼곡하게 적혀 있다.

사용설명서를 꼼꼼히 읽어 나가는 동안 마치 물건을 사용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사용방법을 읽으면서 머릿속에는 내가 그리던 더 나아진 나의 모습, 그 물건의 효과로 내게 결핍된 무엇인가가 채워지는 느낌이 든다. 그것이 전자제품이건 생활 도구이건 사용설명서는 내게 상상만으로도 마치 실제와 같은 만족감을 준다. 마침내 집에 도착해서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물건을 사용한다. 상상했던 그 느낌이 실현된다. 그리고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엄청난 흥분을 불러일으키던 물건, 그토록 갖고 싶어 애태우던 그것이 내 생활의 일부가 되어 있다. 때로는 그 물건을 챙기는 일이 귀찮아지기도 한다. 그리고 다른 물건이 눈에 들어온다. 삶을 개선해줄 더 좋은 물건이 눈에 들어온다. 세상에나 이렇게 좋다고? 이렇게 된다고…? 말도 안 돼! 갖고 싶다 갖고 싶다…. 어느 날 나는 또 다른 사용설명서를 꼼꼼히 읽으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다듬는다. 정말 아름다운 순간이다.

작은 상자에 담긴 기술의 발전 – 프라모델

상자를 열면 어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 로봇이나 각종 메카닉 혹은 캐릭터가 이 사각형의 플라스틱 프레임 안에 가지런히 나뉘어 부품으로 배열되어 붙어 있다. 부품을 하나하나 뜯어내며 감탄을 자아낸다. 아!… 이런 방법으로 만들 수도 있구나. 때론 어렵기도 또 쉽기도 하다. 성급한 마음을 달래며 인내심을 갖고 하나하나 부품을 맞추어 나간다. 드디어 완성이다. 완성작은 고이 장식장에 모셔 둔다. 이들의 가장 큰 적은 가끔 주말 혹은 명절에 나의 작업실로 들이닥치는 조카와 두 아들… 이것을 핑계로 또 새로운 것들을 산다.

오랫동안 프라모델을 만들어 오다 보니 시기별로 나온 여러 제품을 만들어 보게 된다. 덕분에 그 안에 담긴 제작 기술의 발전에 관한 공부가 확실히 된다. 플라스틱은 여러 가지 가공법이 있는데 그중 프라모델은 생활 속의 많은 제품들처럼 금형을 이용해 액체 형태로 바뀐 플라스틱을 주입하고 굳히며 만들어진다. 프라모델을 만들기 위해 설계 아이디어, 형태를 만들 때의 생각 그리고 비용에 대한 고민까지 역추적해 가는 재미가 상당하다. 나의 작업도 결국 무언가를 만들어 가는 일이니 말이다.

세상에 없던 가치 – 3D프린터

나는 애니메이션을 좋아했고 애니메이션 감독을 꿈꾸기도 했었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친구, 후배들과 팀을 꾸려 독립 단편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시작했다. 당시 정부에서는 애니메이션, SF영화 등을 장려하는 정책을 폈고 관심이 높아졌다. 애니메이션을 한다니까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여기저기서 상도 받았다. 당시 휴학 중이던 나는 그런 주목에 한껏 어깨가 들썩였다. 그런데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정책 방향이 바뀌었고, 곧이어 20대 초반의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이 들이닥쳤다. 이것이 내 첫 실패다. 그렇게 팀은 뿔뿔이 흩어졌고 나는 학업을 마치기 위해 학교에 돌아왔다.

당시 나는 한창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물건들의 사용설명서’ 작업을 하고 있었다. 실체는 없고 사용방법만으로 존재하는 물건들. 이 거짓말을 좀 더 구체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러다 물건을 만드는 방법인 설계를 배우게 되고, 실전이 필요해 회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건축 외장 패널이나 상점에 진열되는 물건을 만드는 곳이었는데, 주로 비정형 건축의 외장을 맡아서 진행했다. 여러 가지 산업용 제조 장비를 활용해 볼 수 있었는데 그러다 만난 것이 산업용 3D프린터였다. 그것은 정말 유용하고 대단히 멋져 보였다.

프로젝트를 끝내고 작업으로 돌아가기 위해 회사를 그만두니 장비들을 활용하지 못하는 것이 가장 아쉬웠다. 그즈음 을지로에 개인이 만들어 사용할 수 있는 3D프린터 키트를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작정 찾아가 키트를 받아왔다. 그렇게 제작에 돌입해, 겨우겨우 내가 모델링한 작품의 부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물건이 뭔가를 만들려면 시간이 오래 걸렸다. 결국 다른 곳에서 두 번째 3D프린터를 구입했다. 그런데 이게 말썽이었다. 그 기계를 만든 사람조차 문제를 해결을 못 했다. 어쩔 수 없이 내가 직접 뜯어서 고치다, 종국에는 온전히 혼자 3D프린터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부품을 하나하나 설계하고 가지고 있던 3D프린터로 새 프린터의 부품을 만들었다. 당시 정부 정책으로 이런 업체가 우후죽순 생겨났지만 공개형 3D프린터의 등장에 대한 시대적 고민이나 철학적 방향은 언제나 그렇듯 쏙 빠져 있었다.

나의 첫 번째 3D프린터 키트를 만든 을지로 사람들은 여기저기 강연에 등장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듯했다. 문득 나의 과거가 떠올랐다. 함께 애니메이션을 만들던 시절, 나와 친구들이 감당하기 힘든 어려움을 겪던 때가 생각났다. 이제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빈 부분을 채우기 위해 노력했다. 프린터를 이용해 세상에 없던 가치를 만들어나갈 동료를 찾고 함께 노력해 보자고 하며, 사람들에게 프린터를 만드는 방법과 오픈소스 그리고 메이커 운동에 대해 열심히 말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몇 년이 지난 지금, 나는 더는 혼자가 아닌 친구, 제자들과 함께하고 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정부가 그토록 바라던 잘나가는 3D프린터 회사들은 모두 중국에 있다.

지금도 나의 작업실에는 여러 대의 3D프린터(사실은 작업 로봇이다)가 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밥을 먹지도 않고, 연인과 이별의 슬픔 때문에 일을 쉬지도 않으며, 잠도 자지 않고 계속 일하고 있다. 그리고 그 덕에 나는 더 많은 다른 일을 생각하고 여유를 즐기며 더 많은 시간을 나의 가족과 함께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작품을 만드는 일을 프린터가 다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그들이 바통을 넘기면 작품을 위한 노동을 이어받는 것은 아직은 피할 길이 없다. 방금 프린팅이 하나 끝났다. 이제 내 차례다.

​출처: 창작에 자극을 주는 뜻밖의 물건들 | arte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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